붓다와 하이에크가 동의한 것
중앙 통제도 방임도 아닌, 자생적 질서라는 공통 답
극단은 왜 매력적일까?
인간은 극단에 끌린다. 완전한 통제 아니면 완전한 방임. 엄격한 금욕 아니면 끝없는 쾌락.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삶에서도 극단은 단순하고 명쾌해 보이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하지만 2,500년 전 한 사람이 양쪽 극단을 모두 경험한 후 이렇게 말했다 - "둘 다 아니다."
붓다의 중도
싯다르타 왕자는 왕궁에서 극도의 쾌락을 누렸고, 출가 후에는 6년간 극도의 고행을 했다. 하루에 쌀알 하나로 연명하고, 뼈가 드러날 정도로 몸을 학대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 쾌락에 빠지는 것도, 고행으로 몸을 괴롭히는 것도 깨달음의 길이 아니라는 것을.
이것이 중도(中道, Majjhima Patipada)다. 중도는 "적당히 타협하라"는 미지근한 조언이 아니다. 극단이라는 두 함정을 모두 피하면서, 사물의 본래 모습에 부합하는 길을 찾는 것이다. 팔정도(八正道)가 바로 그 구체적인 방법이다. 올바른 견해, 올바른 사유, 올바른 말... 어느 것도 극단적이지 않으면서도 치열하게 진지하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 이해
오스트리안 경제학파(Austrian School)는 카를 멩거,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등이 세운 경제학 전통이다. 이 학파의 핵심 통찰은 놀라울 정도로 중도와 닮아 있다.
한쪽 극단에는 완전한 국가 통제(사회주의 계획경제)가 있다. 정부가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지 모두 결정하는 체제다. 역사가 증명했듯이, 이 극단은 비효율과 빈곤으로 끝난다. 반대쪽 극단에는 무법 상태(아나키)가 있다. 어떤 규칙도 없는 약육강식의 세계다.
오스트리아 학파가 말하는 자유시장은 이 두 극단 사이의 길이다. 정부가 가격을 통제하거나 화폐를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법과 재산권이 없는 무법 상태도 아니다. 개인의 재산권과 자발적 계약을 보호하되, 시장의 자생적 질서(spontaneous order)를 인위적으로 왜곡하지 않는 것이다.
인위적 개입이라는 극단
중앙은행의 금리 조작을 생각해보라. 금리를 인위적으로 낮추면 단기적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고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것과 비슷하다 - 자연스러운 과정을 강제로 비틀어서 원하는 결과를 만들려는 시도다.
미제스는 이것을 경기변동이론(Business Cycle Theory)으로 설명했다. 인위적으로 낮춘 금리는 잘못된 신호를 보낸다. 기업들은 "지금 투자할 여건이 된다"고 착각하고 과잉 투자를 한다. 이 거품이 터지면 불황이 온다. 인위적 개입이 문제를 해결한 게 아니라 더 큰 문제를 만든 것이다.
붓다도 같은 맥락의 가르침을 한다.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쾌락에 빠지면(통화 팽창으로 불황을 막으려 하면) 더 큰 고통이 따라온다. 고통을 제거하겠다고 극도의 고행을 하면(급격한 긴축) 그것도 또 다른 고통이다.
자연스러운 균형의 지혜
중도와 오스트리안 경제학이 공유하는 가장 깊은 통찰은 자연스러운 질서에 대한 신뢰다. 붓다는 법(Dharma, 진리)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이에크는 시장의 자생적 질서가 어떤 천재적인 계획자보다 효율적이라고 했다.
비트코인은 이 원리를 화폐에 구현한다. 비트코인의 난이도 조절 알고리즘은 중앙 계획자 없이 자동으로 균형을 찾는다. 채굴자가 늘면 난이도가 오르고, 줄면 내려간다. 누군가 개입해서 조정하는 게 아니라, 시스템 자체가 자연스럽게 균형을 유지한다.
중도를 걷는다는 것
극단은 쉬워 보이지만 결국 무너진다. 중도는 어려워 보이지만 오래 살아남는다. 붓다의 가르침이 2,500년을 버틴 것처럼, 시장의 자연스러운 조정 메커니즘도 어떤 인위적 계획보다 견고하다. 중도를 걷는다는 것은 극단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고, 사물의 본성에 따라 행동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